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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ony, walkman, 1979.jpg|thumb|400px|세계 최초의 휴대용 음악 기기인 '워크맨']] 1980년대에 소니는 사업 영역을 굉장히 다양하게 확장시켰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업체 답게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개발하거나, 창사 초기에는 우러러보던 경쟁사였던 필립스와 손을 잡고 [[CD]]를 개발하기도 했다. == 플레이스테이션을 만들다 == 사실 소니가 처음부터 플레이스테이션을 만들며 [[게임기]] 시장, 나아가 게임 산업에 발을 담굴 마음은 없었다. 소니는 게임업계를 주름잡던 [[닌텐도]]와 [[슈퍼 패미콤]]에 들어갈 PCM 사운드 칩을 공급하는 것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나아가 슈퍼 패미콤이라는 기계로 활용할 수 있는 CD-ROM 기반 어댑터의 공동 개발까지 제안해, 결국 두 회사가 협업해 '플레이 스테이션' 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런데 출시 직전까지 갔던 이 프로젝트는 닌텐도측의 일방적인 거부로 끝난다. 당시 닌텐도도 거물이긴 했지만 소니는 전성기 시절의 일본을 대표하는 거대기업이었는데, 그 소니가 이혼 통보를 맞은 셈이었다. 여기에 분노한 소니가 '우리도 게임기를 만들자!'고 방향을 선회해, 1993년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의 첫 기기인 [[플레이스테이션]]을 출시한다. 플레이스테이션을 처음 개발항 당시엔 소니 회사 내부에서 엄청난 반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1995년 이후 소니는 닌텐도나 세가같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사실상 석권하며 워크맨 이후 다시 한번 세계를 뒤흔들 만한 소니의 '대표작'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 '가전 제국' 소니, 나쁜 변화를 선택하다 == 1995년 소니는 회사의 새로운 대표로 이데이 노부유키를 선임한다. '공대' 분위기가 강했던 회사에서 와세다 대학의 경제학과를 졸업한 '문과생'이었던 이데이는 소니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뒤 일본 굴지의 기업이었던 소니의 사장 자리에까지 오르며 샐러리맨의 신화라는 소리까지 들었따. 이데이는 버블경제 붕괴의 후폭풍으로 흔들리고 있던 소니의 도약을 위해 '''디지털 드림 키즈'''라는 새로운 전략을 내세운다. 가전산업 중심이었던 소니가 인터넷이나 콘텐츠에 투자하고, 이 콘텐츠와 소니의 기기를 연결시킨 융합(유비쿼터스)하겠다는 거대한 구상이었다. 유럽의 휴대전화 제조사였던 스웨덴 [[에릭슨]]과 협력해 휴대전화 제조에도 나선다. 이런 이데이의 전략은 초반에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였다. 굴뚝산업의 회사였던 소니가 미래지향적인 인터넷, 컨텐츠, 로봇, 인공지능 같은 것에 투자하며 역대 최고 수준의 영업이익까지 달성하자 언론들은 소니를 혁신 기업으로 치켜세웠다. 그러나 곧 위기가 닥쳤다. 잠깐의 성공에 심취한 소니는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계속 확장해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사업부가 제대로 조율하지 못하면서 밖에서는 '융합'을 외치면서 정작 회사 내부에서는 사업부끼리 서로 알력 다툼을 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특히 사업부별로 매출과 손익을 따로 계산하는 독립채산제를 실시한게 컸는데, 내부에서 경쟁이 심해지자 미래의 먹거리가 될 기술에 투자하는 대신에 당장 매출이 날 수 있는 사업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기술 개발'로 성장했던 소니의 정체성은 그렇게 무너져갔다. 대표적인 것이 [[TV]] 시장에서의 몰락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TV는 생활 가전의 꽃이자 핵심이었고, 앞서 소개한 것처럼 소니는 트리니트론 컬러 TV를 출시한 뒤 브라운관 TV 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TV 시장은 빠르게 LCD나 PDP와 같은 차세대 디스플레이 시장으로 전환되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소니의 자리를 뺏아먹는 동안 소니는 계속 브라운관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 소니 쇼크와 몰락 == 2003년 4월 24일, 결국 일이 터지고 만다. 당시 소니는 1,854억 엔의 영업이익을 거뒀다는 실적을 발표했는데, 문제는 이게 시장의 예상에 비해 무려 1천억 엔 가까이 낮은 수치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다음 분기에는 1,300억 엔이나 영업 이익이 더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치까지 함께 발표되자 시장에서 조금씩 커지고 있던 '소니의 몰락 가능성'이 현실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25일부터 27일까지 소니의 주식은 <del>떡락</del>하한가를 거듭했다. 2000년 주당 16,950엔에 거래됐던 소니의 주가는 3,950엔까지 추락했다. 대표 가전 기업이었던 소니가 무너지자 후지쯔, 캐논, 마쯔시다 등 경쟁 가전사들의 주식도 함께 무너지고, 이에 일본의 주식 시장 지수인 니케이 지수까지 더불어 폴락하며 '''소니 쇼크'''라고 불리는 공포가 시작됐다. 제조업의 미래를 우호적으로 보지 않았던 이데이는 실적 부진을 막기 위해 대규모 구조 조정을 실시한다. 2003년 에 2만 명, 이듬 해에는 다시 1만 명을 해고했다. 그러나 구조조정은 그나마 소니에 남아있던 유능한 엔지니어와 개발자들이 회사를 이탈하는 계기가 되면서 소니는 계속 부진을 거듭한다. 결국 한 때 샐러리맨의 신화이자 미래 시대를 열어가는 CEO로 평가받았던 이데이 노부유키가 다음 정리 해고의 대상이 됐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출시된 소니의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3]]도 회사를 어렵게 만드는 공신(?)이었다. 2003년까지만 해도 소니는 가전사업에서 까먹고 그나마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대표되는 게임 산업에서 이익을 뽑는 구조였기에 차기작인 PS3에 희망을 걸고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초기 PS3은 과도한 생산 원가로 인해 팔면 팔 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워낙에 비싼 가격에 소비자들은 구매를 외면했고, 거액의 투자금을 회수하기는 커녕 적자가 쌓이는 악순환이 반복되며 안그래도 어려운 회사 사정에 부담을 가중시켰다. == 선택과 집중, 그리고 부활 == 이데이를 퇴출시킨 후 소니는 이례적으로 외국인을 CEO로 영입하는 등 어떻게든 영업 부진을 만회하려 노력했지만, 핵심이었던 가전 산업에서 한 번 경쟁력을 잃어버린 후폭풍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적자를 버티지 못해 여러 개의 공장까지 폐쇄했지만 그래도 적자는 계속됐고, 2011년에는 무려 4,567억 엔이라는 사상 최대의 적자까지 내며 회사가 문을 닫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까지 빠졌다. 이에 소니는 사업부들 중에서 그나마 실적이 괜찮았던 엔터테인먼트(게임 등) 사업부 출신인 히라이 가즈오를 새로운 CEO로 영입한다. 히라이는 우선 [[VAIO]] 브랜드로 유명한 컴퓨터 사업부는 물론 화학, 모바일 디스플레이 등 부침이 작았던 사업부들을 과감하게 정리했다. 가전 왕국 소니의 상징이었던 TV도 변화를 시도했는데, 브라비아(BRAVIA)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OLED]]나 [[4K]] 등 고가형 시장에 집중했다. '이러다 정말 망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과감히 사업부를 정리한 히라이는 대신 엔터테인먼트, 게임, 금융, 이미지 센서와 모바일 사업에집중했다. 특히 [[스마트폰]]에서 카메라 성능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자 카메라에 필요한 고품질의 이미지 센서를 만드는 소니가 상당한 이익을 봤고, RX100이나 A시리즈와 같은 카메라 사업 역시 호조를 보이며 소니가 아직 무너지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2018년 히라이는 역대 최고 실적인 7,200억 엔의 영업이익 흑자를 발표하며 CEO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요약: Nginwiki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Nginwiki: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